그룹명/걸어온길

전북 진안신문 이병남 박채량기자님

금석 로석 옛돌 2008. 7. 26. 17:56
       
"내고향은 어머니 품속 같은 마이산"
고 향 사 람
2008년 07월 18일 (금) 18:08:19 박채량 기자 lyang@janews.co.kr

   
 
  ▲ 이병남씨  
 
이 병 남 씨
성수면 좌포리 봉좌마을 출신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금석 이병남 선생이 고향을 떠나온 지 30년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그가 고향에서 보낸 시간들이 이제는 까마득한 옛 일이다.

 

그래도 이따금 귓전을 맴도는 옛 동무들 목소리, 꿈결에 불러보는 고향의 부모님(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어느 날만큼은 생생하다.

 

올해로 쉰하나가 된 이병남 씨의 고향은 성수면 좌포리 봉좌 마을이다. 모두가 그러했듯 이병남 씨의 시골생활도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던, 하루하루가 바빴던 시절이었다.

 

"진성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한 2km정도의 거리를 뛰어 다녔습니다. 어느 정도 잘 사는 친구들은 자전거를 탔지요. 저는 친구의 자전거에 책가방을 맡긴 채 자전거의 속도와 맞추느라 뛰고 또 뛰었죠. 그래서 그 당시 달리기를 참 잘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으면 묵묵히 달렸던 그 시절을 생각하죠. 현재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도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내 고향은 마이산입니다.
이병남씨는 아직도 고향에 가면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 늘 고향에 가는 발걸음만은 가볍다. 집에서 가까워 여름이면 찾았던 풍혈냉천에 마지막으로 들른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며 아쉬워하던 그는 경남 창원의 향우들과 늘 고향이야기를 하며 올해에는 꼭 가리라 다짐을 한다.

부모님이 고인이 되면서 그가 고향을 찾는 횟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물론 친지들이 아직 그곳에 남아있지만 형제들 모두가 고향을 떠나 좀처럼 갈 기회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자주 찾아가지는 못하지만 항상 마이산이 그립습니다. 누가 저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항상 마이산이라고 대답해요. 경상남도 사람들이 진안을 잘 모르는 이유도 있지만, 이상하게 마이산이 꼭 고향 같아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소풍을 늘 마이산으로 다녔고 친구들과 놀러 가도 항상 마이산을 갔거든요. 제 인생에서 마이산을 빼면 참 허무할 것 같습니다."

마이산을 찾으며 늘 새로운 희망을 얻는다는 그. 그리고 마이산을 오를 때면 자신이 사는 이유 중 하나인 서예에 대한 새로운 고찰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고향이 좋단다. 마이산이 좋단다.

◆자연이 모두 놀이였던 어린 시절

주위의 모든 자연환경이 놀이의 매개가 되었던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논에서 불장난을 하다 볏짚을 다 태워 먹었던 기억을 그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얼굴이 붉어진 그는 "그때 마을을 다 태워 먹을 뻔했지 뭐에요. 아버지한테 어찌나 혼쭐이 났던지. 하하하"라며 오랜만에 짓궂은 웃음을 지어본다.

또한 마령에서 관촌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고기를 잡거나, 마이산을 오르내리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의 얼굴도 그는 기억한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노릇이죠. 고기를 잡거나 산에 놀러가거나 불놀이를 하는 것 외엔 뭐 하나 즐길 거리도 없었는데 그땐 뭐가 그리 좋았던지…."
 
◆서예가 금석 이병남

학창시절부터 늘 배웠던 서예를 업으로 삼은 지 어언 25년이다. 서예만을 탐구하고 매진해온 결과 그는 서예에 있어서 가히 최고라 불리는 업적을 세운다.

프랑스에서 한국 서예가로 초청을 받아 창작서예를 전시하기도 했고 영남서화협회 경남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경남에서 몇 안되는 국제서예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또 다양한 지자체 서예교실에 강사로 활동하며 서예전파에 한 몫 하기도 하고 수십 개에 이르는 개인전, 단체전, 초대전 등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

늘 꿈꾸었던 '서예가'라는 이상적인 삶에 다가선 금석 이병남 선생. 그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며 새로운 창작에 도전하며 사는 것에 크나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이루어 기쁘고 즐거울 때 더 고향을 찾고 싶다는 그는 또 다른 창작활동에 여념하며 현재의 삶보다 더 발전한 미래에 도전할 준비를 하느라 오늘도 어김없이 붓을 든다.

박채량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진안신문(http://www.janew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