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1861 ~ 1926
조선 말기~근대기에 활동한 화가이다. 호는 소봉(小蓬), 본관은 미상이다. 이하응의 겸인(傔人)으로서 개화정국의 이면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수연은 구한말의 서화가들과 많은 접촉이 있었으며 언론인으로도 활동했다.
나수연의 가문은 숱한 여항 시인을 배출한 명문이었는데, 부친 나기(羅岐)는 경아전(京衙前) 계통의 시인으로서 대단한 부호였다. 수원 일대의 거대한 전장(田莊)의 소유자로 벽오사(碧梧社)의 구성원이자 후원자였다고 한다.
또한 나기 자신이 서화가는 아니었지만, 임자도에 귀양가있는 조희룡에게 매화병풍을 부탁할 정도로 서화에 광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수연 역시 스스로 난초를 잘 그린 화가이며 후원자로서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한성영어학교를 졸업한 나수연은 1898년(38세) 남궁억(南宮檍) 등과 『황성신문』 창간에 참여했으며, 독립협회 회원으로 민족정신 고취와 민중계몽에도 공헌하였다.
1906년(46세)에는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독립의 기초를 다진다는 취지 아래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를 발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권이 침탈된 뒤에는 서화가로만 활약하였다.
1918년(58세)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회원으로 참가했고, 1921년(61세)부터 열린 서화협회전람회에 글씨와 문인화를 출품하였다. 그림은 묵란(墨蘭)을 즐겨 그렸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를 대필(代筆)할 정도로 사란(寫蘭)에 조예가 깊었다.
현재 전해지는 그림은 주로 50~60대에 제작된 것으로, 소재 구성 면에서 볼 때 대부분 난과 괴석이 함께 구성된 석란화(石蘭畵)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작품의 수는 많지 않지만, 제작 시기에 따른 화풍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50대 무렵에 제작된 작품으로는 1916년(56세)에 제작된 건국대 박물관 소장의 와 유복열 소장의 가 있다.
이들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이하응의 석란화에서 양식적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바위의 면 처리에 중점을 두어 입체감을 살린 점이 주목된다.
무엇보다 바위의 형상과 필묵법 등 구도와 표현에서 이하응의 1891년작 병풍의 묘사방식과 매우 유사하여 그 영향관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나수연의 1916년 작 에 보이는 입석형의 바위와 상대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된 난의 묘사는 이하응의 1891년 작 병풍들 중 입석형 괴석이 있는 폭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묵란의 표현에서 난엽은 가늘고 짧으며 어두1)는 매우 소략하고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어 이하응의 화풍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60대에 제작된 작품을 살펴보면, 일본 유현재(幽玄齋) 소장의 1925년(65세) 작 축 2점과 1926년(66세) 작 와 간송미술관 소장 를 이 시기의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바위와 난의 표현에서 50대에 제작된 그림들과 차이를 보인다. 바위는 농담의 변화가 있는 윤곽선과 태점으로 활기차게 표현되었고, 난의 포기구성은 더욱 풍성하게 처리되었다.
꽃과 난엽의 어울림에서는 말년으로 갈수록 꽃의 비중이 커지며, 특히 하나의 긴 꽃대에 꽃이 무리를 이루며 휘늘어진 듯 표현된 것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혜란(蕙蘭)의 표현은 나수연 말년의 묵란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 요소로서 이하응의 화풍과 구별된다.
또한 60대의 작품에서는 필묵법에서 진한 농묵의 사용과 일필휘지의 탄력 있는 필선이 구사된 것이 주목된다. 이는 50대에 제작된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특히 화면 상단에 동글동글한 특유의 필체로 내려 적은 화제(畵題)는 필묵의 멋이 한결 더 발휘되어 음악적 운율이 느껴진다. 이렇듯 강약의 변화를 강조한 독특한 서풍의 화제는 나수연의 그림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나수연 묵란화풍의 특징을 정리하면, 우선 소재구성 면에서 석란화 형식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50대에 제작된 작품에서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된 괴석의 표현이 두드러졌으며, 난의 표현은 상대적으로 간략하고 담백하게 처리되었다.
이후 60대의 작품에는 바위와 난의 묘사, 그리고 화제의 서풍 등에서 자신감 넘치는 탄력 있는 운필이 돋보인다. 또한 이 시기에는 난의 포기구성이 더욱 풍부하게 처리되고, 꽃 또한 크게 표현된 것이 주목된다.
특히 하나의 꽃대에 꽃이 풍성하게 달려있는 표현은 이하응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수연 화풍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소봉나수연 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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